동한 말기, 헌제(獻帝)의 아버지인 영제(靈帝) 시대부터 한나라는 급속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영제는 국사에 관심이 없고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했으며, 정치는 환관들에게 맡겨두었다. 특히 장양(張讓), 조충(趙忠) 등 십상시(十常侍)라 불리는 환관 집단이 조정을 장악해 권력을 농단하고 뇌물을 받아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마침내 영제 광화(光和) 원년(178년), 태학생 도파(陶波)를 필두로 천여 명의 유생들이 환관 정치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태학생들의 상소'라 불리며, 환관의 축출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영제는 이들을 '당인(黨人)'으로 몰아 투옥하고 관직에서 추방했다. 이를 '당고지화(黨錮之禍)'라 부르며, 이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희생되었다.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년), 갑자기 심각한 가뭄과 기근이 들어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도(太平道)의 교주 장각(張角)이 "청천이 망하고 황천이 일어난다(蒼天已死, 黃天當立)"라는 구호를 내걸고 봉기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머리에 황색 두건을 둘러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렸다.
장각은 두 동생 장보(張寶), 장량(張梁)과 함께 36방의 조직을 만들어 신도를 모집했다. 그들은 "태평(太平)"이라는 부적을 나눠주며 병자를 치료하고 부정한 관리들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민심을 얻었다. 봉기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조기에 시작되었음에도 황건적의 난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조정에서는 서주자사 황복(皇甫嵩), 북중랑장 주준(朱儁) 등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때 유비(劉備)와 그의 의형제 관우(關羽), 장비(張飛)도 의병을 일으켜 황건적 토벌에 참여했다. 결국 장각 형제는 모두 전사하고 난은 진압되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일어나 한나라의 통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영제가 죽고 소제(少帝) 유변(劉辯)이 즉위하자, 황후 하씨(何氏)의 형인 대장군 하진(何進)이 정권을 장악했다. 하진은 환관들의 전횡을 근절하고자 했으나, 황태후는 환관들을 두둔했다. 하진은 당시 형주자사 동탁(董卓)을 불러 환관들을 제거하려 계획했다.
이 계획이 환관들에게 누설되자, 환관들은 하진을 궁중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하진의 부하 원소(袁紹)와 조조(曹操)는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환관들을 학살했다. 황태후와 소제, 그리고 협제(陜帝) 유협(劉協)은 혼란 속에서 궁을 빠져나왔으나, 이미 동탁이 이끄는 서량(西涼) 군대가 낙양성에 진입한 뒤였다.
동탁은 변방의 군벌로, 서량의 강한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입성했다. 그는 하진 살해 사건을 빌미로 정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잔인하고 탐욕스러웠으며, 소제를 폐위시키고 협제를 옹립해 헌제(獻帝)로 삼았다. 헌제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동탁은 황실의 재물을 약탈하고, 조정의 대신들을 무시하며,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그는 대사마 마헌(馬宣)과 태상 황보송(皇甫嵩)을 죽이고, 태초 원소(袁紹)와 조조 등은 낙양을 탈출했다. 또한 동탁은 낙양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장안(長安)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동탁의 폭정에 맞서 각지의 군웅들이 연합군을 결성했다. 원소가 맹주가 되고, 조조, 유비, 공손찬, 도겸, 장모, 원술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청토동탁(淸討董卓)'이라는 명분으로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연합군은 내부의 갈등과 이견으로 단합하지 못했다. 원소와 원술은 형제간이었지만 서로 반목했고, 조조는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동탁 암살 계획을 세웠다. 조조는 천자의 칙서를 받아 동탁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주했다.
한편, 동탁은 연합군의 위협을 받자 더욱 포악해져 조정 대신들을 무고하게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육중한 체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목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무장한 경호원들을 늘 대동했다.
동탁의 양아들이자 부하인 여포(呂布)는 무용이 뛰어나 '비상인간(飛將呂布)'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는 충성심이 부족하고 허영심이 강했다. 동탁은 여포에게 창과 말을 내려 총애했으나, 때로는 그를 의심하고 벌을 주기도 했다.
조정의 태상 왕윤(王允)은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그는 미녀 초선(貂蟬)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연환계(連環計)를 실행했다. 초선은 여포와 동탁 모두에게 애정을 표현하며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다.
여포는 초선을 차지하기 위해 결국 동탁을 배신하기로 결심한다. 192년 5월, 여포는 왕윤과 함께 모의하여 동탁이 입궁하는 길에 습격해 그를 살해했다. 동탁의 시신은 거리에 버려져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동탁이 살해된 후에도 그의 부하 이각(李傕), 곽사(郭汜) 등이 장안을 점령하고 왕윤을 처형했다. 여포는 도망쳤으나 헌제와 조정은 이각 등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헌제는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도중에 험난한 상황에 처했다.
이 시기, 각지의 군웅들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했다. 원소는 북방에서, 조조는 겸허에서, 유비는 서주에서, 손견은 강동에서 각각 세력을 키워갔다. 이들의 경쟁과 충돌은 후대의 삼국시대를 예고하는 서막이 되었다.
그중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진영으로 모셔와 천자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는 점차 북방을 통일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고, 유비와 손권은 각각 서쪽과 동남쪽에서 그에 대항했다.
동한 말기는 '난세영웅(亂世英雄)'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된 혼란은 동탁의 폭정으로 가중되었고, 그 뒤로는 각 지역의 군웅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며 중국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조조는 "치세지능신, 난세지간웅(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평화로운 시대에는 유능한 신하가 되고, 혼란한 시대에는 간사한 영웅이 된다는 뜻으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유비는 한실의 먼 후예로서 한나라의 부흥을 꿈꾸며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고 출사했다. 손견의 아들인 손책은 강동에서 기반을 다졌고, 그의 동생 손권은 후에 강동의 패자가 되었다.
이처럼 한나라의 몰락과 동탁의 폭정은 삼국시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유비, 조조, 손권의 삼웅이 각자의 방식으로 천하를 다투는 대서사시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투쟁과 성쇠는 《삼국지연의》의 중심을 이루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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