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의 3개월이 흘렀다. 이대수의 일상은 이제 새로운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침에는 일본어 학교, 오후에는 소설 집필이나 대학에서의 연구, 저녁에는 명상이나 산책. 그리고 이제 주 1회, 교토대학에서 '수학과 문학의 교차점'이라는 특별 강좌도 맡게 되었다.
강의 첫날, 대수는 긴장된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예상보다 많은 20여 명의 학생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학과 학생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심지어 건축학과 학생들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대수입니다."
그는 서툰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한국에서 온 수학자이자 소설가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함께 수학과 문학의 접점을 탐구해볼 것입니다."
대수는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열었다. 첫 슬라이드에는 하나의 수식이 적혀 있었다.
"L = ∫(C + P + T) · E dt"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문학 작품의 수학적 표현입니다. L은 문학 작품의 가치, C는 캐릭터의 깊이, P는 플롯의 복잡성, T는 주제의 의미, 그리고 E는 감정적 공명입니다. 이 요소들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지가 작품의 전체적인 가치를 결정합니다."
학생들은 흥미롭다는 듯 필기를 시작했다. 대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은 먼저 문학 작품의 구조를 위상수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90분의 강의는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학생들의 질문도 활발했고, 대수의 독특한 접근 방식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강의가 끝난 후,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선생님, 정말 흥미로운 강의였습니다. 선생님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요."
대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제 소설은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있어요. '수식으로 풀어내는 사랑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요."
"알고 있어요! 이미 읽었답니다. 정말 좋았어요. 특히 미분방정식으로 두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대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을 이미 읽은 일본인 독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곧 새 소설도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에요."
"기대할게요, 선생님!"
강의실을 나서는 길, 나카무라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첫 강의 잘 들었습니다. 학생들의 반응도 아주 좋더군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나카무라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 주말, 우리 연구팀이 교토 근교로 작은 여행을 갑니다. 대수 씨도 함께하시겠어요?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과 온천이 있는 곳입니다."
대수는 기꺼이 초대를 수락했다. 교토에 온 지 3개월이 되었지만, 아직 교외로 나가본 적은 없었다.
"좋습니다, 교수님.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주말, 대수는 나카무라 교수의 연구팀과 함께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팀원들은 모두 친절했고, 대수의 서툰 일본어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은 압도적이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대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새어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답군요."
대수는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서 걷던 연구팀의 한 여성 연구원이 미소를 지었다.
"이 숲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여름이라 푸르지만, 가을이 되면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죠."
"사쿠라 씨는 교토 출신인가요?"
"네, 태어날 때부터 쭉 이곳에서 살았어요. 교토의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좋아요."
사쿠라 미유키. 나카무라 교수의 조교로, 위상수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조용하고 지적인 인상의 여성이었다.
"대수 씨의 강의를 들었어요.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문학 작품의 구조를 위상공간으로 해석하는 부분이요."
대수는 놀랐다.
"강의를 들으셨나요?"
"네, 청강했어요. 수학과 문학의 접점은 제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대나무 숲을 거닐며 수학과 문학,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미유키는 대수의 생각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때로는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대수 씨의 소설에서는 수학적 개념이 단순한 비유를 넘어 이야기 구조 자체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그게 정말 독특해요."
대수는 자신의 창작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저에게 소설 쓰기는 일종의 방정식을 푸는 과정과 같아요. 캐릭터, 플롯, 주제... 이 모든 변수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좋은 이야기가 됩니다."
"균형이라... 그것이 대수 씨의 새 소설 제목이기도 하죠? '균형의 방정식'."
대수는 놀랐다.
"어떻게 아셨죠?"
미유키는 웃었다.
"인터넷에서 봤어요. 대수 씨의 팬들이 기대하고 있더군요."
숲을 다 둘러본 후, 연구팀은 근처의 온천 료칸으로 향했다. 전통적인 일본식 온천 여관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다양한 일본 요리들이 테이블에 차려졌다. 대수는 처음 보는 음식들도 용기를 내어 맛보았다.
"이게 뭔가요?"
"유바예요. 두부 피막이죠. 교토의 특산품입니다."
미유키가 설명해주었다.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었다.
식사 후, 대수는 온천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의 생각들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균형..."
그는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균형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서울에서의 복잡했던 일상, 수학과 소설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 모든 것들이 교토에서의 시간을 통해 조금씩 해소되고 있었다.
온천에서 나온 후, 대수는 료칸의 정원을 거닐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때 정원 한쪽 벤치에 앉아 있는 미유키가 보였다.
"아, 이대수 씨."
미유키는 그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면 방해하지 않을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대수는 미유키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참 많네요."
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죠."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유키 씨는 왜 수학을 선택하셨나요?"
대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미유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패턴을 찾는 것이 좋았어요. 세상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위상수학은... 형태가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마음에 들었어요."
대수는 깊이 공감했다.
"저도 비슷한 이유로 수학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결국 소설 쓰기를 더 택하게 되었죠."
"후회는 없나요?"
미유키의 질문에 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요, 후회는 없어요. 다만... 두 가지를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두 세계를 오가고 있죠."
미유키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균형인가요?"
"아마도요. 완벽한 균형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이 상태가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대수는 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유키 씨는 어떤가요?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았나요?"
미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는 중이에요. 학문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다른 것들을 많이 놓친 것 같아요. 가족, 친구들과의 시간, 취미... 균형이라는 건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소설의 주인공도 같은 고민을 해요. 그래서 결국 '108분 집중법'이라는 것을 개발하죠."
"108분 집중법이요?"
"네, 하루를 108분 단위로 나누어 한 가지 일에만 완전히 집중하는 방법이에요. 108개의 염주알처럼, 108분씩 자신의 시간을 나누는 거죠."
미유키의 눈이 반짝였다.
"흥미로운 개념이네요. 실제로 시도해보셨나요?"
"네, 지금도 실천하고 있어요. 완벽하진 않지만, 확실히 도움이 돼요."
그들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학과 문학, 일본과 한국의 문화, 그리고 삶의 균형에 대해. 대수는 오랜만에 자신의 생각을 깊이 나눌 수 있는, 지적인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교토로 돌아온 후, 대수의 일상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했다. '균형의 방정식' 연재가 시작되었고, 예상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었다. 특히 교토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작가님, 교토는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108분 집중법이 정말 효과가 있나요? 저도 시도해보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태수와 사유리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요!]
댓글들이 쏟아졌다. 대수는 소설 속에 실제 자신의 경험을 많이 녹여냈고, '태수'라는 주인공은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최근 추가한 '사유리'라는 여성 캐릭터는... 미유키에게서 영감을 받은 인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아라시야마 여행 이후 대수와 미유키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수학적 토론과 문학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그들의 대화는 더 깊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어느 날 오후, 대수는 교토 대학 근처의 카페에서 미유키와 만났다.
"이번 주 강의 내용 정말 좋았어요."
미유키가 말했다.
"특히 문학 작품에서의 시간의 위상적 구조에 대한 부분이요. 제가 연구하는 분야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대수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다음 강의 준비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 싶었어요. 비선형 내러티브의 수학적 모델링에 대한 부분인데..."
그들은 한 시간 넘게 학술적인 토론을 이어갔다. 두 사람 다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 즐거웠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미유키가 대수의 소설 이야기를 꺼냈다.
"'균형의 방정식' 잘 읽고 있어요. 정말 흥미롭네요."
대수는 약간 긴장했다. 소설 속 '사유리'가 미유키를 모델로 했다는 것을 그녀가 눈치챘을까?
"어... 감사합니다. 어떤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드셨나요?"
미유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주인공 태수가 자신의 삶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미소를 지었다.
"사유리라는 캐릭터가 나온 최근 화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대수는 귀가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유키는 알아차렸을까?
"그렇군요. 사유리는... 최근에 추가된 캐릭터인데,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미유키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제가 영감의 원천인가요?"
대수는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일부 그렇습니다. 미유키 씨와의 대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미유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영광이네요! 제가 소설 속 캐릭터가 될 줄은 몰랐어요."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학문적 동료이자 친구로,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교토에서의 시간이 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대수의 일본어 실력은 크게 향상되어 이제는 거의 모든 일상 대화를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의도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균형의 방정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번역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수는 한국에서 의외의 연락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수학과에서 특별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주제는 '수학과 문학의 융합적 접근'이었다.
"이대수 씨, 교토대학에서의 강의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학과 학생들에게도 귀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요청드립니다."
서울대 수학과 학과장의 이메일이었다. 대수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도 자신이 떠나온 대학으로. 이것은 그의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대수는 무경 스님에게 이메일을 보내 조언을 구했다.
[스님, 서울대에서 강연 요청이 왔습니다. 잠시 한국에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교토에서의 제 균형이 깨질까 걱정되네요.]
스님의 답장은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대수야, 균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찾는 것이란다. 서울로의 여행은 네 균형을 깨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관점에서의 균형을 찾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거라.]
대수는 서울대의 제안을 수락했다. 1주일간의 짧은 방문 일정을 잡았고, '수학적 사랑방정식'의 완결 회차 발표도 한국에서 하기로 했다.
출국 전날 저녁, 미유키가 대수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한국에 가신다고 들었어요."
"네, 1주일 동안요. 서울대에서 강연을 하게 됐어요."
미유키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오실 거죠?"
대수는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제 계약은 아직 1개월이 남았고, 교토에서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니까요."
미유키는 안심한 듯했다.
"다행이에요. 솔직히... 대수 씨가 한국에 가시면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했어요."
대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처음에 교토에 온 것은 6개월이라는 기간을 정해놓고 였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이 거의 다 흘렀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미유키 씨."
대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도 그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6개월 후에 제가 어디에 있을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미유키는 대수를 바라보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셨나요?"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교토에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 찾은 균형, 여기서 만난 사람들..."
그는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특히 당신과의 대화는 제게 너무 소중해요."
미유키의 눈이 반짝였다.
"저도 그래요, 대수 씨. 당신이 계속 이곳에 있으면 좋겠어요."
그날 밤, 대수는 오랜만에 자신의 '나의 방정식' 문서를 열었다. 변수들의 비중이 많이 변했다. 이제 '교토에서의 생활'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었고, '미유키'라는 변수도 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일 한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서울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 교토에 좀 더 오래 머무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나카무라 교수에게 다음 학기 강의 연장 가능성을 타진해볼 생각이었다.
대수는 창밖의 교토 야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인생의 방정식은 계속해서 새로운 변수를 추가하고, 계수를 조정하며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그는 이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균형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는 토후쿠지 스님의 말을 떠올리며 노트북을 열었다. '균형의 방정식' 다음 화를 쓸 시간이었다. 108분간의 온전한 집중. 그것이 그의 균형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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