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연구실 형광등 아래 이대수는 수식이 빼곡한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반쯤 마신 식은 커피와 구겨진 종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안 되는데..."
대수는 한숨을 내쉬며 볼펜을 내려놓았다. 3개월째 매달리고 있는 위상수학 문제는 여전히 그를 비웃듯 풀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포기하고 내일로 미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내일은 지도교수인 김민혁 교수와의 면담이 있는 날이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3시 15분. 그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알림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웹소설 '수학적 사랑방정식' 최신화가 아직 업로드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구독자 감소: 지난주 대비 2.3% 감소했습니다.]
[새 댓글 (23개): "작가님 언제 올려요?", "또 밀리는 건가요?", "기다리다 지쳤어요."]
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인기 웹소설 '수학적 사랑방정식'은 이번 주 연재분이 이미 이틀이나 지연된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독자들의 성화에 밤을 새워서라도 챕터를 올렸겠지만, 내일의 교수 면담이 그보다 더 급했다.
김 교수는 지난 면담에서 경고했다. "다음 달까지 진전이 없으면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네." 박사과정 3년 차, 아직 논문 주제조차 확실히 잡지 못한 대수에게 이는 사실상 퇴출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스마트폰을 끄자 배경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교토의 금각사 사진이었다. 작년 여름, 일주일간의 짧은 일본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대수는 결심했다. 언젠가 일본에서 살겠다고. 벌써 1년. 일본어 공부는 여전히 초급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에이, 그냥 다 때려치울까..."
대수는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인생은 언제부터 이렇게 복잡해진 걸까. 대학원, 웹소설, 일본행 준비.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는 노트북을 열었다. 웹소설 원고 파일을 클릭하자 마지막으로 작업한 페이지가 나타났다. '수학적 사랑방정식' 67화. 절반쯤 작성된 상태로 며칠째 진전이 없었다.
이 소설은 대수의 첫 장편이자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 수학과 여학생과 물리학과 남학생의 로맨스를 다루는 이 소설은 대수의 수학 지식을 십분 활용한 작품이었다. 주인공들이 풀어가는 수학 문제와 물리 법칙들이 은유적으로 그들의 관계와 감정을 표현했고, 이 독특한 접근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올해 초부터는 월 평균 35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준수한 웹소설이 되었다. 대학원 생활비는 물론,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대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수학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수식들은 여전히 그를 조롱하듯 풀리지 않았다. 소설은 마감이 지났고, 논문은 진전이 없었다. 일본어 공부는 언제 하나. 그는 자신의 인생이 모든 면에서 조금씩 뒤처지고 있다고 느꼈다.
"108분..."
그는 문득 지난주 방문했던 절에서 주지스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는 시간을 108개로 나누어 보게. 염주알처럼 하나하나 정성껏 돌리면서."
108분. 1시간 48분. 대수는 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 5시 18분까지 108분. 그 시간 동안 오직 수학 문제에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다른 생각은 모두 차단하고.
그는 스마트폰을 멀리 치우고, 소셜 미디어와 메일이 열린 탭들을 모두 닫았다. 방해받지 않을 108분. 오로지 수학 문제만을 위한 시간.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집중력이 높아지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5시가 넘어갈 무렵, 대수는 작은 돌파구를 발견했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분명 진전이었다.
"이거다!"
대수는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허리와 어깨가 뻐근했다. 그제야 그는 108분 동안 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몇 주 동안 진전이 없던 문제에서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시계는 5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수는 또다시 108분을 계산했다. 7시 13분까지. 이번에는 웹소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노트북을 열고 원고 파일을 눈앞에 띄웠다.
"수학적 사랑방정식, 67화..."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 수학 문제를 풀면서 얻은 통찰이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 묘사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마치 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듯, 단어들이 술술 이어졌다. 108분이 끝나기 전, 대수는 67화를 완성하고 68화의 절반까지 작성했다.
"놀랍네."
대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 느낌이었다. 그는 소설 챕터를 바로 업로드했다. 곧바로 독자들의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새 댓글 (5개): "드디어 왔다!", "기다렸어요!", "역시 작가님!"]
대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7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108분을 계산했다. 9시 1분까지. 이번에는 간단한 식사 후 일본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날 밤, 대수는 오랜만에 성취감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수학, 소설, 일본어. 세 가지 모두 조금씩 진전이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전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대수는 지도교수와의 면담을 위해 연구실로 향했다. 가방 안에는 어젯밤 정리한 연구 노트가 들어있었다. 큰 돌파구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진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들어오게, 대수 군."
김민혁 교수는 언제나처럼 딱딱한 표정으로 대수를 맞았다. 50대 중반의 김 교수는 학계에서 정평이 난 위상수학자였지만, 인간적인 면모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난 한 달 연구 진행 상황은 어떤가?"
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교수님, 어제 저... 작은 발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연구 노트를 펼쳐 보였다. 김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노트를 검토했다. 대수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충분할까? 교수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김 교수는 한참을 노트를 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단 한마디였지만, 대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의 입에서 '흥미롭다'는 말이 나온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이 방향으로 계속 연구해보게. 아직 멀었지만, 잠재력은 있어 보이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대수는 연구실을 나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소한 당장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다. 그는 캠퍼스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어젯밤 올린 소설 챕터의 반응이 뜨거웠다. 구독자 수도 소폭 상승했다.
그때 한 알림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웹소설 전속 작가 제안: '캐슬문학'에서 전속 계약을 제안합니다. 월 고정 500만원, 추가 수익 분배. 자세한 내용은 메일을 확인해주세요.]
대수의 눈이 커졌다. 캐슬문학은 국내 최대 웹소설 플랫폼이었다. 전속 계약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황급히 메일을 열었다.
메일 내용은 놀라웠다. 고정 월급 500만원에 판매 수익의 40%. 조건은 주 3회 이상 정기 연재. 대수의 손이 떨렸다. 이건... 대박이었다.
그러나 곧 현실이 그를 내리쳤다. 주 3회 연재.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연재하기 벅찬데, 3회는... 이건 사실상 전업 작가가 되라는 의미였다.
대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봄하늘이 눈부셨다. 그는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메일을 읽었다. 답장 기한은 일주일. 일주일 안에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대학원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작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갈 것인가.
그는 다시 한번 108분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일까?
대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말에 절을 방문해 스님께 조언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걸음을 옮기며 대수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소설이 된다면 어떨까? '균형의 방정식'이라는 제목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지려다 아무것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청년의 이야기.
그는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이 써야 할 다음 소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그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방정식의
해답을 찾아야 했다.
봄바람이 캠퍼스의 벚꽃잎을 휘날렸다. 대수는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의 108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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