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이대수는 서울 외곽의 법화사를 찾았다. 봄비가 잦아든 후의 절은 신선한 공기로 가득했고, 솔잎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산책로를 오르며 대수는 마음을 정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수야, 오랜만이구나."
법당 앞 마당에서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있던 주지스님이 대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무경 스님은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건강한 기색이 역력했다. 10년 전, 대학 시절 불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인연이었다.
"스님,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네요."
대수는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무경 스님은 빗자루를 세워두고 대수를 다실로 안내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스님이 차를 우리며 물었다. 대수는 잠시 망설였다. 지난 4개월간 그는 절을 찾지 못했다. 논문과 소설 연재 사이에서 시간을 쪼개다 보니 주말마다 찾던 법화사 방문이 뜸해진 것이다.
"바빴습니다, 스님. 논문도 써야 하고... 그리고..."
대수는 자신이 웹소설 작가라는 사실을 스님께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부끄러웠다. 학문적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고 있어요, 웹소설이요."
스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잔에 차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재미있겠네."
대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불안해했는지 의아해졌다. 스님은 전혀 놀라거나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사실... 고민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수는 지난 며칠간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교수의 최후통첩, 웹소설 플랫폼의 전속 계약 제안, 일본 교토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 지원 가능성까지. 그리고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108분 집중법'에 대해서도 말했다.
스님은 차를 홀짝이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다녔다.
"108분이라... 좋은 방법이구나. 108번의 호흡, 108개의 번뇌, 108개의 염주알..."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수야,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향해 그 시간을 쓰느냐는 거다."
대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고민이었다. 수학인가, 소설인가, 아니면 일본행인가.
"스님, 저는 어느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I want it all이라고 하죠, 영어로."
무경 스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대수야, 네가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은 언제니?"
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행복한 순간? 논문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 소설의 새로운 챕터를 완성했을 때? 일본어 회화가 조금씩 늘어갈 때?
"모르겠어요, 스님. 다 행복할 때도 있고, 다 괴로울 때도 있고..."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자. 하루 종일 단 한 가지만 해야 한다면, 너는 무엇을 선택하겠니?"
대수는 깊이 생각했다. 수학? 소설? 일본어?
"...소설이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대수 자신도 놀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자가 되고 싶었다. 소설은 그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부업이었다. 언제부터 소설쓰기가 그에게 이렇게 중요해진 걸까?
"흥미롭구나."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네 머리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구나."
대수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그런 걸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소설가의 길인 걸까?
"하지만 스님, 박사과정을 그만두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소설... 솔직히 불안해요. 지금은 잘 팔리지만, 언제 인기가 식을지 모르잖아요."
스님은 차를 다시 따르며 천천히 대답했다.
"대수야, 불교에서는 '집착'을 고통의 원인으로 봐. 과거에 들인 노력 때문에 미래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일종의 집착이지.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 지금 이 순간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
대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런데 스님, 다 포기하긴 싫어요. 수학도 완전히 놓기는..."
스님은 밝게 웃었다.
"누가 다 포기하라고 했니? 균형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나누는 게 아니라, 각자에게 알맞은 비중을 찾는 거란다. 네 삶의 방정식에서 계수를 조정하는 거지."
대수는 문득 영감을 얻었다. 그렇다. 삶은 방정식이다. 모든 변수가 같은 비중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어떤 변수는 크게, 어떤 변수는 작게. 중요한 건 전체적인 조화다.
"스님, 감사합니다. 조금 정리가 된 것 같아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마라. 항상 108분의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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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대수는 연구실로 향했다. 주말 내내 고민한 끝에 그는 결정을 내렸다. 완전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은 것이다.
연구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김민혁 교수가 있었다. 보통 교수는 오전에 연구실에 오지 않았다.
"아, 대수 군. 잘 왔네."
김 교수는 딱딱한 표정으로 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책상 위에는 대수가 쓴 웹소설 '수학적 사랑방정식'의 프린트물이 놓여 있었다. 대수의 심장이 멈춘 듯했다.
"교...교수님?"
김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자네 소설을 읽어봤네. 재학생 웹소설 순위에서 1위라길래 궁금했거든."
대수는 당황했다. 그의 이중생활이 드러난 것이다. 교수가 자신의 소설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자신의 작품임을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설명드릴게요."
김 교수는 손을 들어 대수의 말을 막았다.
"설명할 필요 없네. 놀랍게도 꽤 재미있더군. 특히 자네가 수학적 개념을 은유로 활용하는 방식이 독특해. 그리고 정확하고."
대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수의 칭찬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감...감사합니다."
김 교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대수 군, 솔직하게 물어보겠네. 자네 정말 박사학위를 원하나?"
대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조건 '네'라고 대답했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수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불확실합니다."
김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 제안을 들어보게."
김 교수의 제안은 의외였다. 박사과정을 일시 중단하고 석사로 졸업한 후, 비상근 연구원 자격으로 연구실과 연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완전한 포기가 아닌, 우선순위의 재조정. 마치 스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김 교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교토대학의 나카무라 교수와 연락해볼 수 있네. 자네가 일본에 관심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특별 청강생 자격으로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대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일본에 관심 있다는 걸..."
김 교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자네 소설 68화에서 주인공이 교토로 유학 가는 장면이 있더군. 세부 묘사가 상당히 구체적이었어."
대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소설에 자전적 요소를 많이 넣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자네는 수학에서는 평범하지만, 글쓰기에는 특별한 재능이 있어 보이네. 그 재능을 키우되, 수학적 배경을 버리지 말게. 그것이 자네만의 독특한 강점이 될 테니."
대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삶의 방정식이 새로운 해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좀 생각해봐도 될까요?"
김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시간을 주지. 그때 자네의 결정을 듣겠네."
대수는 연구실을 나와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캐슬문학에서 온 메일을 다시 열었다. 전속 계약 제안. 이제 이것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새 메모장을 열었다. '균형의 방정식'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첫 문장을 적었다.
"인생은 모든 변수의 합이 항상 일정한 방정식이다. 어느 한 변수의 계수를 키우면, 다른 변수의 계수는 줄어든다. 완벽한 균형이란 없다. 다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변수가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이 방정식의 해를 찾는 첫걸음이다."
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108분. 그것은 내가 찾은 균형의 시간 단위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하나의 세계에 몰입한다. 그리고 다음 108분에는 또 다른 세계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그의 다음 소설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인생이 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캐슬문학의 편집자였다.
[안녕하세요, 이대수 작가님. 전속 계약 검토 중이신가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그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균형점을 찾아야 할지.
"네, 검토 중입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요..."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메시지를 보냈다. 전속 계약은 수락하되, 첫 6개월은 교토에서 원격으로 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주 3회가 아닌 주 2회 연재로 조정해달라는 요청도 포함했다.
답장은 곧바로 왔다.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내부적으로 논의해보겠습니다. 교토라... 새로운 소설의 배경이 될 수도 있겠군요.]
대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인생의 큰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렘이 가득했다.
그는 노트북을 닫고 일어섰다. 이제 108분의 수학 시간이었다. 균형은 포기가 아니라 조화였다. 그는 이제 그것을 이해했다.
대수는 연구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인생은 결국 방정식이다. 모든 변수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순 없지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균형의 방정식의 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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